하늘이 미래를 그린다면 대지는 현재를 그리는 도화지. 현재의 발밑은 과거. 그러니 땅 밑은 오랜 역사부터 망자들의 근간이었으며 잊혀 가는 것들이 만드는 장이었다. 영겁이 흘러 결말마저 마지막을 맞이한 지금 장의사는 그들의 연구年久한 터전을 한 자루의 삽으로 파헤치는 중이다. 겨우내 눈이 내려 얼어붙은 땅은 순도 높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손끝은 차디차게 얼어붙어 푸르게 곱아간다. 갈 곳 잃은 입김이 시야를 흐린다. 무딘 삽의 날을 발로 밟아 밀어 넣고 어렵사리 떠내어 던진다. 씨근거리는 등과 어깨를 따라 식은땀이 번진다. 목 위는 떨어져 나갈 듯 춥고 그 아래부터는 숨이 막히도록 무덥다. 질서 없이 쌓인 흙더미 옆에는 이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다. 싸리눈이 지워내릴 듯 덮어가는 암석 위에 아로새겨진 누군가의 이름. ■ ■ ■ ■ ■ ■. 그 아래의 문장은 '사랑받은 아들이자 무기. 그 광기.'.
같은 이름의 비석이 박힌 무덤들은 도시의 무질서한 건축물처럼 검은 토지를 장식한다. 문장들만 조금씩 상이할 뿐. '사랑받은 아들이자 무기. 그 가족.' 이라거나 '사랑받은 아들이자 무기. 그 복수심.' 이라거나. 모든 무덤은 무자비하게 파헤쳐진다. 눈보라 속에서 삽이 움직이는 소음만이 유일하게 살아 숨쉰다. 수많은 흙덩이와 텅 빈 구멍들은 포화가 쓸고 지나간 전쟁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랑받은 아들이자 무기. 그 파트너와의 관계.' 라고 새겨진 돌덩이가 퍽 넘어진다.
내가 네 파트너가 아니었다면, 너는 날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지.
…그렇지 않아.
첫 만남을 고스란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차가운 시선 아래 흰 뺨으로 드리워지던 속눈썹의 그림자를 만져보고 싶었던 까닭이다. 관에서 아른아른 흩날려 눈두덩이를 뒤덮을 양 떨어지던 장미꽃이 눈물 같았던 탓이다. 몰아쉰 숨이 일시에 울컥 터져 나온다. 흙투성이가 된 손을 들어 아무렇게나 이마를 닦는다. 입안으로 눈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기어들어 와 녹는다. 또 한 차례 퍼내어 버리는 흙 한 덩이. 우수수 부서지는 땅의 한기를 느끼며 장의사는 차마 묻지 못하고 묻지 못한 것들을 상기한다. 영혼과 영혼이 맞닿아, 그 내밀하고 은근한 내부를 들춰 보았던 순간을. 광기가 아니었다면 한평생을 살아가며 하나의 개인을 이런 식으로 들여다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꿈에서 너를 봤어. 누군가를 싫어하면서 좋아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 ….
완벽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대장장이가 무기의 재료를 단조하듯 두드리고 태우고 누르고 지지고 식혔다. 애정이 없다면 이런 행동은 불가능하다. 관심에 기반한 행동이 어떻게 폭력이고 집착이 된다는 건지 장의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 정말 뻔한 농담이다 -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동시에 그에 어울리고 싶었다. 상대가 본받을 만한 장인이, 주인이 되자. 그러면 더 이상 나를 싫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 ….
날이 저물어간다. 혹한이 찾아들고 수마가 덮쳐온다. 온 세상의 어둠이 몰려들어 목을 조르는데, 미련한 장의사는 자리를 뜨지 않고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눈발이 굵어져 눈을 뜨기 힘들다. 통나무 같은 어깨와 머리 위로 흙과 눈이 섞여 켜켜이 쌓인다.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 그 대상이 아무리 너라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싫어? 나도 너 싫거든?
끝까지 들어.
힘주어 내리박은 삽의 끝에 묵직한 무언가가 걸린다.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 그렇지만 너를 …
쉼 없이 파내려가던 삽이 구덩이 바깥으로 내던져지며 날카롭게 울린다. 발 아래, 전고의 공간에 자리 잡은 거대한 상자를 내려다본다. 검은 가시 위에 맺힌 꽃송이 위로 눈이 쌓인다. 넝쿨의 가시가 손을 찢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관의 표면을 쓸어내린다. 비린 핏물이 천화를 붉게 물들인다.
너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없어.